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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안전 보장 없는 휴전 없다”(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의 자서전 ‘댜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표지가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미국 사령관이 됐다”는 구절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측이 더욱 전진해 오는 서곡이 되리라고 확신해 정전 조인을 반대했다’(이승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대결이 끝나지 않는 한 한국의 평화적 재통일은 어렵지 않나하는 염려가 있다’(아이젠하워)

‘사상 처음으로 승리없는 전쟁의 휴전협정에 조인한 미군사령관이 됐다. 패배감을 느꼈다. 조인 후 형언할 수 없는 좌절감에 소리없는 눈물마저 흘렸다’(클라크)

정전협정에 서명하면서 전투가 끝난 안도와 평화에 대한 희망보다는 비감함이 서려있듯 누구도 만족하지 않았지만 협정은 맺어지고 전쟁은 일단 끝났다. 하야를 무릅 쓴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반대 분투와 저항은 ‘한미동맹조약’으로만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정전 협상을 벌이고 있는 유엔군측과 공산측. 협상 초기 대표로 참석한 백선엽 장군은 중공군측에 비해 북한측 대표의 표정이 굳어 있었으며 북한 이상조는 한국에 대해 ‘미 제국주의를 추종해 상가집 x보다 못하다’는 욕설이나 끄적이고 있었다고 했다.

스탈린 사망으로 고비 넘다

포로 교환 기준 등을 두고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해 협상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3월 15일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현재 분쟁 중이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는 협상 원칙하에서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밝혔다. 말렌코프 정부는 6·25 전쟁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되어 온 포로의 무조건 송환 원칙을 고집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포로 문제 등을 빌미로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 유럽에서 외교적 이득을 보려했으나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말렌코프 정부의 정전 선회는 미국이 취할 조치 중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는 분석도 있다. 핵무기 사용 가능성까지 포함한 전쟁에서 승산이 없는 소모적인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작용했다는 것이다.(선즈화, 581쪽) 공산주의자들은 아이젠하워가 원자탄두를 오키나와에 배치하고 이의 사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아이젠하워가 국내외로부터 전쟁을 확대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김계동, 373쪽) 일본의 대표적인 한국전쟁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는 통설과는 다르게 ‘스탈린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아 그의 죽음으로 정전협상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하루키, 537쪽)

중공군 병사들이 정전협정 체결 소식을 들은 뒤 환호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 = 홍진환 기자

전황 따라 오락가락한 마오쩌둥과 김일성

마오쩌둥(毛澤東)은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참전한 뒤 38선을 넘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할 때는 “미군은 한반도와 대만 해협에서 철수하라”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춘계 대공세(4월 22~30일, 5월 16∼20일)마저 실패로 돌아간 뒤 “싸우면서 담판하고, 담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전에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이 사망하자 마오는 소모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분석이 있다. 3월 11일 스탈린의 장례식 참석차 모스크바에 온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소련 지도부에 정전 협정을 서둘러 달라는 요청을 했고, 소련측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판초프, 551쪽)

김일성은 1951년 5월 마오쩌둥이 6차 대공세 이후 정전으로 선회한 후에도 신속한 승리를 주장하며 6월말에서 7월 중순까지 중조 연합군이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다. 마오가 전쟁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자 “차라리 중국인 도움없이 전쟁을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선즈화, 563쪽)

그러던 김일성은 미군기에 의해 북한 주요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가는 상황에서 1952년 이후 마오에게 휴전을 호소했으나 이번에는 마오가 듣지 않았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해 제압하겠다고 했다. 중공이 버틸수록 북한은 더욱 황폐화됐다.(정일화, 552쪽)

아이젠하워가 공약대로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해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만났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

아이젠하워의 강온 양면 휴전 전략

1952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명예로운 휴전’을 공약으로 제시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돼 정권이 교체된 것도 협상 진전의 요인으로 꼽힌다. 아이젠하워는 협상에 적극적이면서도 휴전을 위해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한국군 증강, 미 제7함대의 대만중립화 해제로 중공에 대한 심리적 압력 가중, 그리고 덜레스 국무장관을 시켜 한국의 교착상태가 지속된다면 핵사용도 불사한다는 위협을 중소 관리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힘을 바탕으로 한 강온양면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이용호, 116쪽)

클라크 사령관은 공산측이 아이젠하워 당선 이후 휴전 협상에 적극 나선데는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미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한국 전쟁에 전력투구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도 갖고 있었다고 보았다.(클라크, 19쪽)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측 대표가 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서명 전후 아무런 인사말이나 악수도 없이 각자 서명만 하고 나갔다.

 ‘12분만에 끝난 정전 협정 서명’
 
1953년 7월 27일 10시 유엔군 측 수석대표 해리슨과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아 정전협정에 각각 서명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159회 만이었다. 한글 영어 중국어로 된 정전협정문 각 6부, 모두 18부에 양측은 각각 12분씩 서명을 마친 후 단 한마디의 인사말 없이 회담장을 떠났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오후 1시 문산 극장,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펑더화이(彭德懷) 중공군사령관은 평양과 개성에서 각각 서명했다. 한국 대표는 협정 서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협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이날 밤 10시 모든 전선의 포성이 멎었고 1129일간의 전쟁은 중지되었다.

7월 31일 김일성은 평양에서 중공군 지도부도 초청한 축하 만찬을 열고 훈장도 수여했다. 8월 3일 회창 중공군 사령부에서도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훙쉐즈 부사령관은 참전명분인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훙쉐즈, 439쪽) 침략으로 3년간 한반도가 황폐화되고 한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미국 등 유엔군이 확전을 자제해 정권을 유지하고 응징당하지 않은 것을 승리로 여기는 그들만의 셈법이었다.



북한은 정전 협정에 서명한 장소를 ‘평화 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다. 협정 서명 당시에는 지웠던 ‘피카소의 비둘기’가 지붕의 삼각형 부분에 새겨져 있다. 출처 영문위키.

피카소의 비둘기. 1949년 작품. 출처 영문위키

판문점에 웬 피카소의 ‘비둘기’?

회담 당시 판문점은 초가 서너채만 있는 농촌이었다. 3천평의 터를 닦고 천막을 지어 회의장으로 사용했다. 공산측이 천막을 제공하고 유엔은 전기와 난방시설 공사를 맡았다. 지금의 판문점보다 약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협정 조인을 위해 공산측은 회담 장소 북쪽에 강당같은 목조단층 건물을 지었다. 기와지붕 처마밑 삼각형 부분에 피카소의 ‘비둘기’(1949년 작)를 본뜬 두 마리의 비둘기 그림을 그려 넣었다가 유엔군측 항의로 지웠다.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피카소의 비둘기로 평화를 애호하는 것처럼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북한은 협정을 조인했던 건물을 ‘평화박물관’으로 바꿔 보존하고 있는데 ‘비둘기’가 있다. 더우기 1976년 도끼 만행 사건 때 사용된 무기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영문 위키)

개성에서 옮겨와 정전 협상 회담을 이어간 판문점 주위가 모두 논밭이다. 전쟁기념관 전시.

이승만, ‘미군 철수하면 공산측 다시 쳐들어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가 애치슨 라인 선언으로 미국의 방어선 밖으로 밀려나고 해방후 주둔했던 미 24군단 3개 사단이 전차 한 대 안 남기고 떠나 북한의 남침을 불러왔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1951년 6월 휴전 협상 분위기가 높아지자 북한군의 무장해제와 중국군의 철수 등 조건을 제시하며 휴전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한 것은 휴전 이후 외국 군대의 철수 때문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철수해도 강 하나만 건너면 다시 올 수 있지만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가면 전쟁이 발생했을때 다시 군대를 추슬러 올 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을 중단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1953년 4월 9일 아이젠하워에 보낸 서신에서 ‘중국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상태로 휴전되면 한국 정부는 압록강까지 진격하지 않는 동맹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라며 미군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에는 “중국군의 주둔을 허용하는 협정을 맺으면 한국군을 유엔지휘권에서 철수시켜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클라크가 한국군의 작전권 이양 약속을 어기고 단독 행동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설득했으나 ‘자살을 의미한다고 해도 국군은 싸움을 계속하고 자신이 직접 지휘하겠다’고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클라크, 460쪽)


판문점의 황량한 들판에 정전 협상을 위해 설치된 천막과 양측의 경비병들.

현재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정전 협정 당시의 협상 장소는 현 위치에서 1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뒤로 보이는 건물은 북한의 판문각.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