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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영천이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없다” 철수만 3차례 고민한 미군(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5회]

경북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영천 대첩’의 의미와 경과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기념관 외부에는 전투 체험시설도 마련됐다. 영천 = 구자룡 기자  

영천전투 호국기념관의 ‘영천의 위기’ 안내문. 왼쪽에 태평양의 사모아섬이 표시되어 있다. 전투에서 패배하면 한국 정부가 이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경북 영천의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2층 전시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천의 위기’를 설명하면서 태평양의 미국령 사모아섬 위치를 커다란 세계 지도 위에 표기해 놓은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부산까지 함락되면 한국군과 정부 인사 및 민간인 62만 명가량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는 ‘신한국 창설 계획’을 미 합참이 영천 전투(9월 5〜13일) 전에 세웠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사모아 프로젝트’는 아군이 영천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비밀 계획으로만 그치고 실행되지 않았다. 영천 전투 이틀 후 인천상륙작전도 취소되지 않고 계획대로 실행될 수 있었다. 

6·25 전쟁 개전 이후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고 다시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밀고 내려온 뒤 ‘고지전’ 국면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미군은 최소 3차례 한반도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영천 전투 호국기념관’ 앞의 ‘호국의 불꽃’  조형물.  영천 = 구자룡 기자 

“영천 무너지면, 인천상륙도 포기한다” 

1950년 9월 8일. 낙동강 방어선 ‘최후의 결전’이라고도 불리는 영천 전투가 한창인 때였다.  대구 육군본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 사무실로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찾아왔다.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맥아더 장군의 극비 지시 사항이라며 영천을 적에게 넘겨주는 경우를 상정한 것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도 보고하지 말라고 했다. 철수 장소는 ‘아메리칸 군도’라고만 했다. 
정 총장이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 작전명)도 세워져 있는데 영천이 떨어지면 이 작전도 취소되는 것이냐고 물었다. 워커는 “불가피한 일이죠”라고 대답했다. 당시 낙동강 전투 상황에 따라 인천상륙작전도 취소하고 미군은 철수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이다.(정일권, 85〜86쪽)

월튼 해리스 워커 미 8군 사령관.  낙동강 최후 방어선 ‘워커 라인’을 지켜내  6·25 전쟁에서 반격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 12월 23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전사했다. 

정 총장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이튿날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가려면 가라고 하시오. 영천이 무너져 적군이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싸울 것이요”라고 반발했다. 9월 4일부터 13일까지 영천 전투에서 두 번 뺏기고 두 번 빼앗는 전투 끝에 아군은 영천을 지켜냈다. 물론 미군 철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워커는 “우리끼리 했던 얘기로 없던 걸로 합시다”고 말했다. 육군군사연구소는 “신한국 계획은 미국이 6·25 전쟁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1129일간의 전쟁’, 116쪽)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외부에 조성된 ‘염원의 마당’. 이름없는 참전용사들을 추모하며 경례하는 병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묘명용사의 묘비에는 반지, 안경 혹은 신발 한 짝 유품만이 새겨져 있어 전사자 시신도 찾지 못한 안타까움을 더한다. 영천 = 구자룡 기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져 대구가 함락될 경우에 대비해 미군이 설정해 놓고 있던 ‘밀양 방어선’도 한반도 엑시트 전략의 중간 단계 격이었다. 밀양은 대구와 부산의 중간 길목.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을 뚫고 대구를 점령하면 철수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밀양 방어선은 그런 시간을 벌기 위해 미군이 마지막으로 북한군을 잠시 묶어두기 위해 설정한 ‘철수용 방어선’이었다. 상부 지시로 방어선을 설계한 미 8군 공병참모 이름을 따서 ‘데이비드슨 라인’이라고 불렸다. 이 방어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는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 정부는 제주도로, 한반도에 전개했던 미군은 일본 등으로 철수시킨다는 계획이었다.(백선엽 2권, 234쪽)

영천전투 호국기념관 옆에 건립된 영천 대첩비. 국군 8사단 이성가 사단장 지휘하에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하고 북진 반격의 첫발을 내딛게 했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영천 = 구자룡 기자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기를 보면 1950년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후 전선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면서 미군 철수 우려가 나오고 있었다.

“미국은 그들의 군사전략이나 국익의 득실, 또는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가들의 정략이라는 저울대 위에 남한 땅을 올려놓고 있다. 남한 땅을 포기하는 것이 자국의 복합적인 이익에 부합된다는 쪽으로 저울 바늘이 기울 때, 그들은 냉큼 부산까지 내려가 훌쩍 떠날 수도 있다.”(8월 1일 자)

8월 9일 이승만은 전시내각을 소집했는데 최악의 경우 정부는 제주도로 옮겨야겠지만 자신은 대구를 사수하겠다고 했다. 8월 14일에도 무초 주한 미 대사가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간 뒤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이승만이 발끈했다. 

무초 대사는 “남한 전체가 점령되면 망명정부를 (세워 대한민국을) 지속시켜 나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허리에 차고 있던 모젤 권총을 꺼내 위아래로 흔들며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요”라고 말했다.

8월 16일 밀양에 있던 영국군 장교는 “낙동강 전역에 걸쳐 사단급 병력의 적이 밀려오고 있다. 오늘 밤에는 더 많은 적이 도하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밀양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다”는 전문을 보냈다.(페렌바크, 221쪽) 

경기 양평군 지평리 전투기념관에 전시된 리지웨이 사령관 사진.  양평 = 구자룡 기자 

“중공군 강압에 의한 철군” 

두 번째 미군 철수 위기는 중공군이 참전해 유엔군이 북한에서 후퇴한 뒤 어디까지 밀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일 때였다. 중공군이 38선을 넘어 내려오기 4일 전인 12월 22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중공군이 전략을 보강해 유엔군을 한국에서 축출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면 유엔군 철수 결정을 정부 차원에서 빨리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합참은 이를 ‘강압에 의한 철군 결정’이라고 규정하고 트루먼의 재가를 받아 맥아더에 전달했다. 표현만 달리했지 ‘중공군 강압으로 철군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미 2사단이 평양 북쪽 군우리에서 한 개 연대 이상이 괴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는 등 서부전선에서 미 8군이 밀물처럼 올라갔다가 썰물처럼 후퇴한 뒤였다. ‘성공적인 후퇴’라고는 하지만 동부전선의 제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봉쇄돼 흥남에서 해상탈출을 하고 있던 때였다. 흥남항구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마지막으로 항구를 떠난 것이 12월 24일이었다. 2차례 공세를 펼친 중공군이 언제 다시 공격해올지 몰라 ‘중공군 포비아’가 커지던 때였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