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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3)[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 중공군의 ‘지하 만리장성’ 땅굴

따발총을 든 중공군이 땅굴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홍진환 기자

중공군의 땅굴은 미군의 전투기 공습을 견디며 지구전을 벌이기 위해서 등장했다. 중공군은 1951년 가을 산기슭에 소규모로 팠던 땅굴을 서로 이어 붙이면서 말발굽 모양의 땅굴로 발전했다. 그해 10월 중공군사령부 차원에서 전군에 땅굴 공사를 지시했다. 땅굴은 단순히 상대의 화력으로부터 지키는 방어 목적뿐 아니라 기습공격에도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사령부는 땅굴 공사의 규격 기준을 만들어 전군에 내려보냈다. 7가지 방어는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즉 공습(防空) 포격(防砲) 독가스(防毒) 비(防雨) 습기(防濕) 불(防火) 추위(防寒)다. 땅굴 파기 지침이 내려간 뒤 전선에는 땅굴 파기 열풍이 불어닥쳤다.

중공군 땅굴 속의 작전 회의실. ‘영웅적이고 용감하게 적을 죽이자’는 섬뜩한 문구가 안에 걸려 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땅굴을 재현해 놓았다. 단둥=홍진환 기자

중공군 제12군은 8개월간 40여곳에 대장간을 만들어 1만6천여 점 땅굴 도구를 만들었다. 땅굴 파기 확대로 수요가 늘면서 후방 랴오닝(遼寧)성 선양(沈陽)에 ‘기재처’를 만들어 땅굴 파기 기자재의 구입 생산 분배를 맡겼다. 평양 삼등 양덕에도 땅굴 기재 공급기지를 세웠다.

1952년 5월 말까지 제1선 방어진지 땅굴 공사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 8월 말에는 동, 서해안에서도 집중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6개 군단이 땅굴 약 2백km, 참호와 교통호 약 6백50km, 각종 화기엄폐물 1만여 개를 건설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km 길이의 모든 전선에 구축된 폭 20~30km의 방어선에 땅굴을 핵심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을 형성했다.(훙쉐즈, 390쪽).

중국이 한국 전쟁 참전 후 가장 큰 승리로 꼽는 상감령 전투도 바로 이 ‘지하 만리장성’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다고 한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재현해 놓은 땅굴 속 도서관. 단둥=홍진환 기자

‘지하 창고형 땅굴’은 물자 보존 창구 역할도 했다. 1952년 5~6월 중공군 후근사령부는 차량 1200대 분량의 물자를 저장할 창고를 구축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1952년 8월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면서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지하 2층으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단점도 적지 않았다. 땅굴 생활을 하려다 보니 콩기름이든 등유든 기름이 많이 소모됐다. 병사들은 산소가 부족해 기관지염에 걸리고 식수가 부족해 혀가 갈라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참고문헌
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 미디어, 2010.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