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김병연] 김정은에게 ‘경제’는 운명이다

권력 유지를 위해 김정은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핵무기일까, 경제 개발일까. 핵무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지금 그에겐 핵무기보다 ‘경제 살리기’가 더 중요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핵을 보유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독재자에게 ‘경제’는 운명처럼 늘 따라다닌다. 여기서 장기 집권의 성공 여부도 결정된다. 젊은 독재자로서 변화한 북한 주민을 상대해야 하는 김정은에겐 더욱 그렇다.
  
소련 통치자도 경제를 살리고자 처절하리만큼 노력했다. 1917~18년의 러시아혁명 이후 무리한 사회주의 정책에다 내전까지 겹쳐 소련 경제는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 산업 생산은 혁명 이전에 비해 70%나 감소했다. 레닌은 눈물을 머금고 이전에 추진했던 사회주의 정책 대부분을 취소해야만 했다. 시장을 부활시키고 농업과 중소기업의 국유화를 폐지했다. 독재자로서 생존하기 위해서였다. 1985년 공산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도 질식 상태였던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회주의 종주국의 체면도 버린 채 중국 배우기에 나섰다.
  
김정은은 더 절박하다. 그는 당연히 장기 집권을 원할 것이다. 경제학자 맨서 올슨(Mancur Olson)은 권력자를 유랑형(roving)과 정주형(stationary)으로 나눴다. 전자는 단기에 가능한 많은 자원을 약탈하고 떠나는 유형인 반면 후자는 한곳에 머물면서 장기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거기서 지대를 얻는 타입이다. 따라서 정주형 독재자는 그 방법의 적합성 문제는 있지만 나름대로 경제 개발을 위해 노력한다. 경제를 살리려는 김정은의 의지는 오십이 넘어 권력을 장악한 그의 아버지에 비해 훨씬 강할 것이다.
  
북한 사회와 주민의 변화 때문에도 경제가 더 중요해졌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시장화 바람은 북한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주민의 70% 이상은 시장에서 돈을 벌어 가계를 꾸리며, 전체 가계소득의 70% 이상은 시장 활동에서 나온다. 시장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스스로 선택해 구입하고 자신의 결정에 따라 돈을 벌고 잃기도 한다. 주는 대로 받던 배급의 시기, 지정해 준 직장에서 정해진 월급을 받던 시절, 그때엔 ‘나’라는 존재 의식은 희박했다. 이제 북한 주민은 시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나’를 찾고 있다.
  
시장은 집단주의의 무덤이지만 ‘개인’과 ‘자리심(自利心)’의 탄생지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탈북민 설문조사에 따르면 ‘집단’보다 ‘개인’이 더 중요하다는 응답은 2012년 80%에서 2018년 90%로 단기간에 10%포인트나 증가했다. 성분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던 비(非)핵심 계층도 물려받은 불평등을 역전시킬 기회를 시장에서 찾았다. 시장이 사회를 통째로 흔들고 있다.
  
김정은은 그의 아버지에 비해 운(?)이 없다. 김정일은 아직 ‘개인’에 눈뜨지 않은 주민을 통치했다. 집단주의 가치관이 편만할 때엔 집단을 위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궁핍과 순종을 요구할 수 있었다. ‘고난의 행군’ 동안 70만 명이 아사했지만 김정일이 여전히 선군(先軍)정치를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이 상대해야 하는 주민은 이전과 다르며 더욱 달라질 것이다. 이들은 집단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풍요를 갈구한다. 이 욕구를 채우지 못한다면 체제 유지는 어렵다. 이것이 선군정치가 2013년에 핵·경제 병진으로, 2018년에는 다시 경제 집중 노선으로 바뀐 배경이다.
  
김정은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핵이 없으면 불안하지만 살 수는 있다. 미국과 신뢰를 다지고 평화협정을 맺으면 어느 정도 안심이다. 그러나 경제 실패는 확실한 나의 종말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미국도 북한에 확실한 메시지와 오퍼를 줘야 한다. 먼저 한국은 비핵화 없이는 경협이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래 핵 정도만 포기하고 제재 해제와 경협, 그리고 평화협정을 얻으려는 북한의 시도를 부추길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이런 부등가 교환에 동의해 제재를 해제하고 평화협정을 맺지는 않을 것이다.
  
한·미는 비핵화로 북한이 얻을 경제적 이익과 그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국제사회와 함께 만들어 북한에 제시해야 한다. 비핵화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추상적 언급만으로써는 북한을 완전한 비핵화로 끌어내기 힘들다. 비핵화도, 그 이후 남북관계도 경제라는 지렛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김정은에게 운명이 된 경제를 통해 남북과 북·미가 어떻게 접점을 찾는가에 한반도 명운이 달려 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김정은에게 ‘경제’는 운명이다 (2018년 10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