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김병연] 굴라시와 크렘린, 그리고 북한
헝가리 전통 음식 굴라시(Goulash)는 모든 것이 뒤섞인 잡탕 수프다. 각종 야채와 쇠고기가 걸쭉한 국물에 섞여 있다. 이 말을 따서 헝가리 사회주의를 굴라시 사회주의라 불렀다. 사회주의에 자본주의 요소가 뒤섞인 독특한 체제였던 것이다. 재산권은 국유였지만 중앙계획은 없었다. 1980년대에는 사유권도 일부 허락돼 국유 기업과 연관된 사기업이 생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일하는 제빵 국유 기업에서 빵을 떼어 와 자기 가게에서 파는 식이었다.
 
러시아는 크렘린(Kremlin) 자본주의다. 체제 전환기를 거치면서 러시아는 강력한 국가 개입과 최고 권력자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자본주의가 됐다. 1990년대 국유 기업의 사유화 과정에서 권력층에 뇌물을 주고 특혜를 받아 올리가르히(과두재벌)가 탄생했다. 정치와 과두재벌의 유착이 생긴 것이다. 옐친에 이어 2대 러시아 대통령이 된 푸틴은 멀쩡한 사기업을 국유화하는 등 21세기에 차르(황제)처럼 행동했다.
 
굴라시 사회주의와 크렘린 자본주의의 공통점은 높은 수준의 부패다. 몇 년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택시를 탔다. 20분이 걸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튿날엔 같은 장소를 걸어서 갔는데 불과 15분이 걸렸다. 세계투명성기구에 따르면 2017년 헝가리의 청렴도 순위는 유럽연합 회원국 중 불가리아에 이어 밑에서 두 번째였다. 사회주의 시기의 높은 부패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같은 자료는 러시아의 청렴도 순위를 세계 180개국 중 135위로 밝혔다. 러시아와 비슷한 일인당 국민소득을 가진 나라 중 러시아보다 더 부패한 나라는 없다. 부패는 비공식 경제를 키우고 또 후자는 전자를 자극한다. 그 결과 러시아·헝가리 모두 비공식 경제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높다.
 
북한은 굴라시와 크렘린을 합해 놓았다. 잡탕 경제체제, 독재, 높은 부패와 비공식 경제가 결합돼 있다. 중앙계획은 작동을 거의 멈췄으며 소규모 비공식 사유화도 진전되고 있다. 국유 기업은 버스와 트럭을 개인 운송 사업자에게 임대해 수입을 챙긴다. 공식적으로는 임차권을 준 것이지만 실제는 소유권과 비슷하다. 군(軍)이 소유한 수산물 기업은 개인에게 고깃배를 판다. 이 업자는 서해에서 고기를 잡아 중국 배에 넘겨주는 일명 배치기로 외화를 벌고 그 일부를 군에 바친다. 큰 뇌물은 주로 대외무역과 외화벌이에서 발생한다. 외화벌이 사업과 무역을 위해 당·군·내각 등에 속한 국가 기관끼리 서로 경쟁을 벌인다. 이를 통해 큰 외화수입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공식 경제 규모와 부패는 헝가리와 소련을 훨씬 능가한다. 소련 가계소득의 16%가 비공식 경제활동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북한은 그 수치가 70%를 넘는다. 굴라시 사회주의도 이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 소련 말기엔 가계 지출의 4% 정도가 뇌물로 쓰였던 데 비해 북한에서는 총 지출의 10%가 뇌물로 나간다. 힘 있는 관료들은 비공식 사업의 뒤를 봐주거나 여권, 평양 거주권, 아파트 입사증을 발급해 주는 대가로 뇌물을 챙긴다. 광산 채굴권과 수산업에는 한화 수천만원 이상의 뇌물이 오가기도 한다. 세계투명성기구에 따르면 국가 기능이 거의 붕괴된 나라를 제외하고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부패했다.  
     
비공식 경제와 뇌물은 단기적으론 경제에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론 체제 유지에 치명적 독이다.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사적 경제활동이 많아진다는 것은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적과의 동침이다. 뇌물은 권력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관료의 존재를 의미한다. 시간이 갈수록 돈의 포섭력과 장악력은 증가한다. 더욱이 권력은 축적되지 않으나 돈은 축적이 가능하다. 장기적으로 독재 권력이 돈의 세력을 이길 수 없는 이유다.
 
변화된 북한 현실은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사유재산권을 보장하도록 김정은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로의 체제이행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렵다면 권력과 돈이 타협하는 방안도 있다. 시장 활동에 조세를 부과해 얻은 재원으로 관료에게 적절한 수준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공식 경제와 부패를 줄여 체제붕괴를 막을
수 있다. 이같이 시장 활동을 공식 영역으로 끌어들여 세금을 부과하되 그 활동을 보장해 준다면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이 점차 확대되면 북한 경제의 지속 성장도 가능하다. 바로 중국이 걸어갔던 개혁·개방의 길이다. 과연 굴라시와 크렘린이 판다를 만날 수 있을까. 북한의 미래를 읽는 관전 포인트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출처: 중앙일보] [중앙시평] 굴라시와 크렘린, 그리고 북한 (2018년 8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