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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혹한과 인해전술 이긴 장진호 철수작전(上)(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2회]

미국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군을 형상화한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앞쪽에 ‘알지 못하는 나라,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선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국가는 경의를 표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워싱턴 = 구자룡 기자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에 있는 미 7사단 31연대 깃발. 중국은 장진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념관의 초입에 걸어 놓았다. 단둥 = 홍진환 기자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 좌측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작전에 투입된 형상의 병사들 기념비가 있다. 6·25 전쟁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미 제1 해병사단 병사들이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 항미원조기념관은 내부 전시를 시작하는 곳에 장진호 전투에서 뺏은 미 제7사단 31연대 깃발을 걸어놨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전투이자 서로의 자존심이 걸린 역사의 한 장면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7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12만명의 인해전술을 돌파하는 기적같은 성과를 거뒀다”고 발언하자 의원들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다음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장진호 전투는 중국이 위대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반발했다.

1950년 10월 원산에 상륙하는 미 해군 등 유엔 각 국의 선박이 원산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 10군단 뒤늦은 원산 상륙

10월 1일 38선을 돌파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은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6사단이 초산에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던 10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원산에 찾아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연설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 8군과 10군단의 지휘권을 2원화해 10군단은 육로로 북진하지 않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 바다로 한반도를 돌아오느라 26일에야 원산항에 상륙했다. 맥아더가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킨 것은 워커의 미 8군이 평양으로 진격할 때 동쪽에서 협공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국군은 이미 원산을 점령한 뒤 보름이 지난 뒤였다. 평양도 19일 국군 1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에 의해 탈환한 후였다.


국군 6사단 ‘초산 과속’의 역풍

평양 점령을 돕기 위해 서진(西進)할 필요가 없어지자 11월 15일 맥아더는 군단의 진격 방향을 바꿨다. 장진호 서쪽의 유담리를 거쳐 자강도 무평리와 강계 등 서북 방향으로 올라가 중공군의 후방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러스, 116쪽) 하지만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한 10월 26일 8군 지휘하의 국군 2군단 6사단은 이미 초산에서 압록강에 도달했다. 6사단은 ‘초산 과속’으로 압록강 도달 이튿날부터 중공군의 매복 포위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 여파는 2군단 전체의 참패로 이어졌다.


국군 6사단이 초산에 도달했을 때 전선을 보면 좌우 부대와의 보조없이 불쑥 튀어나와 있다. 19일 압록강을 건너와 매복해 기다리고 있던 중공군에게 돌출된 6사단은 공격의 호재를 제공했다. 측후방에 빈틈이 많기 때문이다. 6사단은 퇴로가 차단됐고 6사단을 도우려던 2군단 예하 7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 중공군의 분리 포위 타격에 당한 것이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달했던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보급이 두절되고 탄약이 떨어져 진퇴유곡이었다”며 사단장으로부터 휴대용 전투 장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 또는 소각하고 이동(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임부택, 319쪽).

6사단의 원래 주둔지는 탄광과 석회광이 있어 광산 개발이 활발했고 광물회사가 보유한 트럭이 많은 강원도 춘천과 영월 일대였다. 전쟁 후 이들 트럭을 징발해 기동력이 뛰어나 개전 초기 춘천 홍천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압록강 북진 작전에서는 홀로 앞서나갔던 것이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구멍 뚫리고 퇴로 차단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6·25 전쟁에 투입되는 중공군 병사들이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원조하고, 가정과 국가를 지킨다’는 구호를 외치는 사진이 걸려 있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초산 과속’으로 괴멸된 6사단과 7사단, 즉 국군 2군단에 구멍이 뚫렸다. 워커와 알몬드간 지휘권 분할로 동서부 전선 사이에 80km 이상의 틈이 있는데다 두 전선 사이의 2군단 마져 무너지자 중공군은 유유히 내려와 11월 9일 원산을 점령한 뒤 미 3사단을 위로 쫓아 올렸다. 이때 멀리 함경북도까지 진격해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퇴로가 끊겼다. 이후 개마고원의 인공호수 장진호에서의 혹한 전투, 흥남 해상철수, 10만 피란민의 눈물 등이 이어졌다.(애플먼, 24쪽)

알몬드 10군단장


동부 전선에서 아군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 공격을 받는 급박한 상황인데도 11월 24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나왔다. 크리스마스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공세를 펼치라는 명령이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현장의 실상을 전하기는 커녕 사령관의 뜻에 부응해 북진에 가속명령을 내린 것이 11월 27일이었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 이후 잠적하듯 모습을 감췄지만 미 10군단 제1 해병사단이 함흥을 거쳐 장진호 방향으로 올라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길게 전선이 늘어져 분산되는 것을 지켜보며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 제1 해병사단이 장진호 주변 유담리 하갈우리 신흥리 등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있던 중공군 9병단 3개군 소속 10개 사단이 공격을 개시한 것도 알몬드가 진격 명령을 내린 27일이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전투가 시작됐다.


사전 ‘경고’ 무시한 댓가

중공군이 11월 27일 대공세를 시작하기 한 달 전인 10월 28일 국군 26연대(혜산진 부대)는 장진호〜흥남 사이 수동에서의 소규모 전투에서 중공군 16명을 생포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124사단 박격포 부대 소속이라며 3개 사단이 북쪽에서 장진호를 향해 오고 있다고 털어놨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즉각 도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사령부는 놀라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았다.(애플맨, 20쪽). 이미 대규모로 장진호 주변으로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정보에 어두웠던 아군의 힘겨운 장진호 전투의 시련은 이때 시작됐다.

27일 공세 하루 전에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서 중공군 3명이 민가에 숨어 있다가 7연대 정찰대에 투항했다. 이들은 “20군의 60사단, 58사단, 59사단이 유담리에 6일간 주둔해 있었으며 2개 해병 연대가 하갈우리와 유담리 사이 덕동고개를 통과한 뒤 해병항공대의 근접지원을 피해 어두워진 후에 공격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말단 병사가 대규모 작전계획을 알고 있을 리 없다, 허위 정보를 전할 임무를 띠고 민가에 남겨진 미끼일 수도 있다며 포로의 말을 믿지 않았다.(러스, 128쪽). 이 정보는 장진호 동쪽의 미 7사단 31연대에 전달되지 않아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해 ‘장진호 동쪽의 참극’으로 이어졌다.(애플먼, 73쪽)

26일 밤 7연대 3대대 쪽에서도 민간인 한 명이 붙잡혀 심문을 했는데 “남서 방면으로 중공군 길 안내를 해주고 가는데, 행군 종대의 길이가 3시간 걸리는 길이였다. 말이 끄는 대포도 있었다”고 했다.

중공군 포로의 진술을 믿지 않은 것은 첫 운산전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포로는 전체 부대의 이동과 배치, 병력 수, 일부 작전 내용까지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고 순순히 털어놨다. 백선엽 장군은 후에 국방부의 ‘전사(戰史)’를 보고 궁금증을 풀었다고 했다. 중공군 지도부가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왜 싸워야 하는지 정신교육과 함께 전투 작전의 세세한 정보도 공유해 위아래 없이 동료의식을 갖게 한 것이라고 했다.(백선엽 1권, 246쪽). 때문에 포로의 진술은 매우 값진 정보였지만 맥아더와 사령부는 줄곧 소홀히 취급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장진호 안내 전시관 입구에 ‘빙설 장진호’라고 표기되어 있다. 장진호 전투가 혹한의 전투였음을 전시관만 봐도 알 수 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