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中, ‘정의롭지 못한’ 6·25 전쟁 참전(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동북의 북한 망명정부’ 왜 마오의 아킬레스건인가

마오가 ‘동북의 조선 망명정부’를 막기 위해 소련의 공군 지원 없이도 참전하도록 결정하게 할 만큼 심각한 사안인 것은 무엇일까. 1월 소련과 맺은 동맹조약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중국 동북지역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으면 전쟁은 동북 지방까지 확대된다. 그럴 경우 스탈린은 중소동맹조약에 따라 중공군의 작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십만의 소련 극동군을 동북에 파병할 근거를 갖게 된다.(선즈화, 485쪽)

스탈린은 5일 마오에게 참전을 독려하는 전보에서도 이러한 뜻을 밝혔다. 일본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 소련은 일본과의 전투를 구실로 동북에 출병했다.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중국 주권을 훼손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했다.

6·25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돼 소련이 출병하면 전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장제스 정부 때처럼 소련군이 주둔하며 동북의 주권을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마오의 고민이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이 중국 국내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렇다고 ‘북한 동북 망명정부’가 들어섰는데 소련의 동북 출병을 거부하면 중소동맹조약도 난파될 우려가 있다. 마오가 신중국 건설에 필요한 군사 외교 경제적 지원은 어려워진다. 전쟁으로 미국과도 적대 관계가 된 상황에서 소련까지 돌아서면 공산당 정권도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선즈화, 488쪽)

동북에 군대를 보유한 북한 망명정부는 시도 때도 없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마오로서는 이것은 국경 너머에 미군이 주둔해 있는 것보다 더 나쁜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었다. 마오가 내부의 반대 의견과 스탈린이 항공 지원 약속도 받지 못했음에도 파병을 결정한 속사정 중의 하나다.(키신저, 182쪽)

“아무리 큰 어려움이 있어도 이제 인민지원군이 도강해 조선을 지원하는 것은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 출동 시기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미국을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스탈린과의 풍파가 일단락된 10월 18일 마오는 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단호하게 이같은 파병 명령을 전달했다.

중국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의 ‘항미원조기념탑’. 동쪽으로 압록강 너머 북한을 향하고 있다. 기념관 자리는 한반도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13병단의 포병 지휘소가 있던 곳이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중공 참전의 다양한 이유들

마오의 한국전쟁 참전 이유 중에는 국공 내전 기간 받았던 김일성으로부터 받은 도움에 빚을 갚는 것도 있다. 1946∼9년 2차 국공내전 기간 국민당 군대를 우회하는 두 개의 수송 및 보급로가 북한 지역을 지났다. 북한은 중공군의 전략적 후방 기지로도 활용됐다. 부상자와 부대원 가족 1만5000명이 피해 있었고 물자와 무기 장비도 제공받았다.

스탈린은 마오에 대해 “마치 빨간 껍질에 하얀 속살이 있는 순무와도 같다”며 ‘제2의 마셜 티토’라고 의심했다. 이런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스탈린이 참전을 원할 때 참전해야 했다. 소련의 무기 도입으로 중국군을 현대화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에 도움을 받는 등 스탈린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의혹 해소는 꼭 필요했다.(쑤이, 30쪽)

1949년 8월 장제스가 남한을 방문해 이승만과 반공 동맹을 도모한 것도 김일성을 돕기 위해 참전한 한 요인이다. 국민당군이 미군 지원 아래 한국에 공군기지를 건설한 뒤 중국 대륙 공중 폭격에 활용하려는 것을 마오는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쑤이, 55쪽)

중국은 북한이 38선을 넘은 이후 미국이 제7함대를 대만해협에 파견한 것을 보고 마오는 미국이 내정불간섭 원칙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마오의 필생의 과업인 중국 통일의 꿈을 수포로 만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오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을 참전시키며 결의를 보였다.(선즈화, 481쪽)

중국 베이징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의 첨단 스텔스 전투기 젠-20 모형과 중국군 병사들. 베이징 = 홍진환 기자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