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신석호] 북한 경제의 질곡, 박봉주의 위기

북한은 지난달 10일 대남 선전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한 경제적 손실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초특급 방역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결심하고 실천에 옮길 일이 아니다”라는 대목이다. ‘인민의 생명 안전을 위한 국가적인 중대사로 내세우시고’라는 기사 제목처럼 김정은과 노동당이 이번 사태에 적극 대응하고 있음을 홍보하려는 게지만 코로나19가 불러온 글로벌 경제위기 광풍에 북한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대외경제 관계를 최소화하는 폐쇄적 북한 경제의 특성을 감안하면 코로나19의 파장은 미국과 한국 등의 개방경제보다 상대적으로 작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이 수년 동안 국제사회의 고강도 경제제재를 받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최근까지 북한 경제가 지탱하고 있는 것은 당국이 그동안 축적해 온 보유 달러를 풀어 수입을 계속한 결과라는 관측이 나온다. 대북제재로 인한 경제 동요를 막기 위해 보유 외환을 풀어 쓰던 차에 코로나19 사태가 덮친 형국인 셈이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박봉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과 김재룡 내각 총리가 최근 여러 지역을 돌며 경제를 챙기는 모습이 노동신문에 자주 보도되는 것은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지난달 31일 보도에 따르면 이들은 나란히 마스크를 쓰고 평양종합병원 건설현장을 찾았다. 지난달 17일에도 마스크를 쓴 채 사리원 유기질 복합비료 공장과 남포 의료기구 공장을 방문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현재 박봉주는 노동당의 경제정책 수장, 김재룡은 내각의 경제실무 수장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박봉주가 다시 현장에 나온 것은 상징적이다. 2019년 3월 내각 총리 자리를 김 총리에게 물려준 그는 지난해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 건강 이상설이 돌았다.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의 경제정책을 관료정치의 관점에서 비교한 ‘북한의 경제개혁과 관료정치’를 출간한 한기범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김정일 시대에 내각의 수장으로 시장화를 추진하다가 당과 부딪쳤던 박봉주가 지금은 당을 위해서 뛰고 있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박봉주는 김정일에서 김정은 시대로 이어지는 북한 경제위기의 정책 사령탑이다. 김정일의 제한적 경제개혁 조치인 ‘7·1 경제관리 개선’(2002년)과 종합시장 도입(2003년) 조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자 2003년 9월 내각 총리에 발탁됐다. 이후 과감한 시장화와 분권화 조치를 추진했지만 노동당 내 보수파의 역풍을 맞았다. 당 간부들은 “시장이 번지면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신화인 구호나무가 중국으로 밀거래되기에 이르렀다”고 공격했다. 결국 2005년 하반기를 정점으로 박봉주의 개혁조치는 막을 내렸고 김정일은 2007년 4월 그를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강등시켰다.


 박봉주는 김정은 체제 출범 후인 2013년 4월 다시 내각 총리로 재기했다. 김정은은 그를 앞세워 시장화와 분권화 개혁정책을 조용히 추진했지만 무모한 핵·미사일 정책을 강행해 지금의 경제봉쇄를 자초했다. 지난해 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는 당시까지의 개혁정책에서 후퇴해 ‘위기상황의 정면돌파’를 강조하며 제한된 자원과 시장에 대한 당과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좌경화했다.


최근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선 “심각한 자금난으로 북한 관리들이 돈만 주면 기밀문서라도 밀수출할 판”이라는 말이 나온다. 잘못된 정책이 경제난을 악화시키고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 박봉주가 이번에는 시장의 이름으로 희생양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신석호 동아일보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출처: 동아일보 2020.04.03 오늘과 내일] 북한 경제의 질곡, 박봉주의 위기